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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하자/Insight

[5, 6주차] 세계사(World history), 인간중심 시대로의 변화! 근현대(modern and contemporary period)

by shiningmoon 2017. 2. 27.

 

세계사_근현대(2/26, 일)

1) 절대왕정
2) 절대 왕권 붕괴 3단계
 - 영국의 권리장전
 - 미국의 독립선언서
 - 프랑스 인권선언, 나폴레옹의 역할

빈체제와 유럽 시민혁명

- 대프랑스 동맹

- 빈체제

 

세계사_근현대(3/5, 일)

자유주의 정치체제

런던 만국 박람회

국민주의 정치체제

독일 통일과정

이태리 통일과정

제 1차 세계대전

윌슨의 14조와 국제연맹

남북 전쟁과 다음 세기의 주역-미합중국

사회주의와 다음 세기의 주역-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1) 절대왕정

정의 : 16~18세기 중세 봉건 사회에서 근대 시민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나타난 절대 군주에 의한 정치 지배 체제.

근대 초기 유럽에서 보인 전제적 정치형태, 시민혁명으로 가는 단초제공

인과 : 교황권 붕괴의 3단계인 르네상스 시기, 신대륙 발견, 종교개혁이라는 '인강성 재발견'을 거치며 마지막 교황권의 몰락으로 무너져버렸음. 신 중심의 세계를 상지하던 신성로마제국은 수십개의 국민국가(국민, 영토, 주권)들로 쪼개졌음. 중세시절의 황제와 교황권에 의존하며 권력을 유지해오던 제후(왕)들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 그럼 앞으로 어떻게 ?

: 중세는 적어도 공동사회 내부에 있어서는 이해의 동질성이 존재하고 있어 사회의 질서와 안정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앞으로 중세의 공동사회에서 해방된 개개인을 기초로하여 사회질서와 안정을 이룩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즉, 교황이라는 이해의 동질을 잃어버린 공동체, 다시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가지고 오자! '절대왕정'과 '국가주권'

절대왕정의 기반 :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일반민중의 자발적 협력을 얻을 필요가 있었음. 많은 경우 계몽주의나 국민교욱의 이념이 절대주의의 전개와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는 것은 이러한 필요에서 나온것.

계몽주의 : 프로테스탄티즘, 자연법사상 

국가주권의 기반 : 주권(국가의 목숨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의 절대성 요구라는 관념은 교회의 권력이나 영주의 권력에 대항하여 세속적 국가를 확립하기 위한 이론적 무기+국가권력을 종교나 전통의 속박에서 해방하기 위한 요구.

즉, 국가권력을 이러한 속박에서 해방한다는 것은 또한 그 존재이유를 명백히 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음. 국가권력은 그 자체의 존재이유를 묻지 않으면 안되는 일로 되어 있었음. 절대군주의 정통성을 옹호하기 위하여 왕권신수설이 채용되었으나, 이 경우에도 왕은 신성하기 때문에 최고권력을 가진것이 아니라, 최고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신성한 것으로 되었다.

-> 왕권신수설(왕의 권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 관료제도, 상비군 (무한정 커지는 왕의 재력을 제제할 능력이 있는 시민 계층 미성숙->왕권신수설 가능하게 함. ->>>>> 화폐의 필요성 대두

경제권력의 기반 : 이 시기에 지리상의 발견이후 화평의 중요성이 제기되면서 왕은 자신의 권력으로 재력을 키워감. 화폐의 중요성과 맞물려 왕들은 상업을 중요시하게 되고, 무역에서 차액을 남겨 재력을 키우려고 함. 이 모습이 결국 자본주의 초기로 왕의 재력 확충 덕분에 본격화하기 시작하였음.

중상주의(국내 상공업 육성, 보호관세, 식민지 쟁탈)

참고) 왕은 신흥 중산층인 상업 자본가를 그의 권력 아래 보호하였는데 이는 절대 왕권 자체를 무너뜨릴 시민계층을 급속히 키워주는 역사적 아이러니가 됨.

 

의의 : 권가권력 그 자체의 존재이유에 관한 이론의 전개는 시민국가 시기에 들어온 후 생긴 일이었지만, 주권론의 등장이 그 첫걸음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임. 또한, 절대주의 국가에서 근대국가 통치기구의 골격이 형성되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됨. 인격적 지배가 전근대적 사회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객관적 기구지배가 근대국가의 특질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임.  

 

절대 왕정의 두 형태

독일과 이탈리아 : 국가의 중심 권력인 황제와 교황이 강력한 권위를 보이던 중세에 덩달아 강하게 보였음. 하지만 근대로 접어들면서 교황과 황제가 유럽 전역에서 권위를 상실하자 통일 왕국이 들어서는 19세기 말까지 방황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음. 

프랑스 : 백년전쟁 중 최대 격전지인 아쟁쿠르 전투에서 봉건 귀족들이 대부분 전사 -> 왕의 견제세력이 없어지자 자연스럽게 왕권강화-> 왕들은 자신의 욕망과 이권을 챙김, 위로부터의 철저한 권위적 통치-> 루이 14세가 대표적, 상비군 강화하고 남은 귀족의 권한 축소, 재력확충을 위한 중상주의 강조, 시민지 획득하고자 많은 전쟁 -> 왕권이 약해진 18세기 후바에 가서 국민들은 프랑스 대혁명 일으킴

백년전쟁(영국이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하려고 하여 벌어진 전쟁)

영국 : 백년전쟁으로 봉건 귀족들의 생명 손실이 적었지만, 프랑스 내 영토 상실-> (그 이후 유럽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에 휩쓸리지 않아 독자적인 국민국가 형성에 배경->전쟁의 공포를 피해 플랑드르로부터 이민온 기술직이민들이 모직물 공업에 부흥 -> 경제적 발전에 기초)-> 더불어 장미전쟁을 치루며 왕자들의 난 -> 결국 비도덕성 때문에 국민에서 외면-> 국민들이 헨리 7세 인정-> 헨리튜터가 왕조를 세우고 종친이나 봉건 귀족들의 견제가 없는 절대왕정을 세움-> 헨리와 튜더의 자손들은 장미전쟁을 종식시킨 국민을 의식한 통치->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절대왕정의 결실은 튜더가의 엘리자베스 1세 때 나타남.

즉, 이를 통해 제해권을 손에 쥔 경제강국으로의 도약, 미래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 영국이란 수석어가 생김. 엘리자베스 이후 시민혁명기에도 왕과 타협한 입헌군주제가 연착륙한 것은 이러한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프랑스 혁명기에 무정부 시대의 혼란 및 나폴레옹 군부 통치등의 곤욕을 치었던 것과 대비)

 

결국, 프랑스의 위로부터의 왕권강화와 영국에서의 국민의 지지를 통한 아래부터의 왕권강화 특성이 두 나라의 시민혁명기 및 자본주의 경제 성립의 갈림길에 큰 영향을 주었음.

 

 

2) 절대 왕권의 붕괴의 3단계

중세 교황권의 제거를 위해서 르네상스, 지리상 발견, 종교개혁이라는 '인간성 재발견'의 3단계 과정이 있었음. 이런 과정으로 교황권이 무너지자 당연히 그 자리에 민권이 대체될 것이라 생각. 그러나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절대 왕권이었음. 하지만 절대왕권도 민권 신장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으며 결국 민권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음. 이 상황은 영국과 프랑스의 시민혁명에서 확실하게 볼 수 있음.

영국혁명(왕과 타협)

영국의 절대왕권에는 국민과의 타협적인 정서가 형성되어 있었음. 때문에 시민권을 찾는 움직임이 영국에서 먼저 시작된 것은 당연한 절차! 의회의 움직임-헌법아래 왕의 권한이 놓여있다는 입헌군주제 성립

즉, 민권을 행사하던 의회와 왕의 타협이 역사에 처음 소개됨.

미국혁명(왕과 결별)

이후 입헌군주정을 획득한 영국의 통치하에 있던 미국 식민지인들은 대서양 너머 아메리카 대륙에 있다는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왕과의 결별'까지 생각하게 됨.   

프랑스 대혁명(왕의 제거)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한 절대 군주가 있던 프랑스 국민들, 영국과 미국의 선례를 보면서 더욱 용기를 받음. 이들은 혁명을 통해 왕을 제거하고 제1공화정을 열었음. (루이 16세의 처형) -> 절대왕권 몰락의 절정

 

- 1689년 영국의 권리장전

-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서

- 1789년 프랑스 인권 선언서와 나폴레옹의 역할

 















 

세계사_근현대(3/5, 일)

 

빈체제와 유럽 시민혁명
 - 대프랑스 동맹
 - 빈체제
자유주의 정치체제
런던 만국 박람회
국민주의 정치체제
독일 통일과정
 - 1871  독일 민족이 중심이 된 각 연방국가들이 독일 제국으로 통일된 사건.
 -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민주공화국이 독일연방공화국에 통일된 사건
이태리 통일과정 
제 1차 세계대전
윌슨의 14조와 국제연맹
남북 전쟁과 다음 세기의 주역-미합중국
사회주의와 다음 세기의 주역-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빈체제와 유럽 시민혁명

- 대프랑스 동맹

- 빈체제

정의 :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가 상호견제의 세력 균형체제를 유지하기 위함에 존재함.

특징 : 반동주의 

당시 영국은 민주주의, 자본주의, 합리적 사고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음.

'기본권 -> 입헌군주정' : 민주주의가 빈체제 아래에서 흔들릴 리스크 -> 빈체제 탈퇴

'자본주의로 진화하고 있음' : 대세를 거르지 않았음.

1차 산업혁명 : 인간의 노동력을 기계가 대신함, 이로 인해 잉여생산물의 증가, 제국주의(시장의 확대), 화폐의 중요성 확대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이 지배하는 체제가 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영국은 1차 산업혁명을 통해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 있는 여러 밑바탕을 가지고 있었고, 공급과다로 인해 공황상태, 노동자 생계위협-> 영국정부의 노력-> 노동자 인권보호-> 민주주의 발달의 순으로 진행되고 있었음.

 

자유주의 정치체제(Liberalism)

개개인이 공동체 삶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자유와 평등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가장 근접하게 한 체제.

영국은 빈체제와 결별한 영국의 정책책임자들은 빈 체제의 전제 국가들에 강력히 대항할 수 있는 민주공화정 성격의 새로운 정체를 찾고 있었는데, 그 가능성이 선거법 개정에서 엿보이기 시작했음.

곡물법폐지로 싼 수입 곡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도시 노동자들은 임금이 예전과 같아도 활용할 수 있는 금액이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삶의 질이 높아지고, 높아진 삶의 질로 상품의 질도 높아져서 어느 나라와 경쟁해도 자신 있는 상태가 되었음. -> 영국 정부는 관세가 없는 자유무역 정책을 대외에 정신 선포하고 재력을 쌓아나감. 

영국 : 의회주의(도시 상공업자 포함)+자유방임주의(부를 만들면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평등해질 수 있음, 이를 극대화하기 위한 자유시장 경쟁체제)

- 종교개혁

- 만인사제설-> 민권의식의 성장

- 프로테스탄티즘-> 칼뱅, 소유권 경제기반, 자본주의 정신

- 신자유주의 -> 이기심의 확대

런던 만국 박람회

인과 : 1846년 곡물법폐지이후 영국은 본격적으로 자유무역 정책을 추진해 나감. 특히 값싼 수입곡물이 들어와 도시 산업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에 활력, 상대적으로 질 좋은 물품생산.

정의 : 영국정부는 이런 강력한 자유무역 정책을 과시하고자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를 개최 

의의 :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등이 박람회를 계기로 자본주의의 중요성을 깨달음. 

결국, 런던 만국 박람회는 영국이 만든 자유주의 정체를 유럽 각국들에게 수출하는 박람회 역할을 했던 것이다.

-> 영국이 누리게 된 자유주의 정체를 유럽 국가들이 인식하고 추구하도록 동기 부여를 제공했다.

 

국민주의 정치체제(Nationalism)

유럽 여러 국가들이 18세기에는 루이 14세의 절대 왕정을 흠모했다면 19세기에는 영국의 자유주의 정체를 흠모함. 하지만 유럽 국가들이 자유주의 정치체제로 들어서려면 의회주의+자본주의라는 과제를 함께 풀어야만 했음.

두 과제를 풀어야 하는 대표적인 국가들은 독일과 이탈리아 (이들은 중세 때 황제와 교황이 정치의 중심 역할을 했기에 새로운 정치체제 마련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 그러나 영국와 프랑스 시민혁명의 영향, 영국의 자본주의 국가로의 도약을 바라보며 변화를 보이기 시작함)

독일 : 관세동맹을 결성하여 게르만 연방끼리의 자유무역을 시도, 이것이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로 연결되자 독일이 하나의 통일 국가를 이룰 기틀이 마련.

게르만인을 하나로 묶어 줄 재상 비스마르크 등장, 실질적 통일이 구체화, 1871년에 통일국가 탄생

 

독일 통일과정

독일에서 통일을 하려면 전쟁이 필요했음(주변국은 독일이 세질까봐 반대),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통일

1871년 : 독일 민족이 중심이 된 각 연방국가들이 독일 제국으로 통일된 사건.

배경 : 프랑스 혁명을 통해 자유의 공기를 맛본 사람들은 더 이상 낡은 체제를 참고 받아들이여 하지 않음. 1848년, 유럽 곳곳에서 잇따라 혁명이 일어남.  

프로이센이 이루어 낸 통일은 위로부터 진행된 국민 국가 건설과정이었다. 독일의 예는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여러 나라나 일본같은, 자본주의 발전이 더딘 나라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도 독일과 비슷한 시기에 통일을 이룸.

과정

1806 : 피히테,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문을 통해 나폴레옹의 침약에 맞서 민족 정신을 강조

1834 : 프로이센 중심의 관세 동맹 결성

1848 : 베를린에서 3월 혁명 발발(유럽 전체가 혁명의 불길)

- 1848년 2월 프랑스 2월 혁명, 나폴레옹의 몰락이후 우여곡절 끝에 수립된 왕정은 소수 대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민중들을 억압-> 흉년으로 식량 사정이 악화-> 민중들의 불만이 커짐-> 혁명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얼어붙었던 전 유럽으로 삽시간에 번짐 -> 이 2월 혁명이 성공하자 3월 유럽 전역이 혁명의 불길에 휩싸임. 

결국, 빈회의를 주도하던 메테르니히가 쫓겨나고, *독일도 혁명이 일어남, 영국은 차티스트 운동이 재개되어 무려 500만명이 선거법 개정 서명 운동에 나섬 -> 모든 국민의 봄이 온 듯함.

->> 낡은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체제, 즉 국민 국가가 자리 잡기 위한 진통이었음.

*독일도 혁명

베를린에서도 혁명의 불길, 그 결과 통일 헌법을 만들 의회가 만들어짐. 

1849 :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 헌법 초안 작성

그러나 혁명의 기운에 놀란 독일 연방의 여러 정부들은 곧 이런 노력을 짓밝고 혁명을 진압해 낡은 체제를 지키려함. 헌법은 무시되었고 의회는 해산됨. -> 그러나 언제까지 왕과 귀족의 통치가 지속될 수 없었음(부르주아들이 이미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 이들에게 밀리지 않으려면 낡은 체제의 지배층도 스스로 변하는 수밖에 없었음. 

1862 : 비스마르크, 프로이센 총리 취임

"지금 우리의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로는 해결할 수 없다, 오직 철과 피 곧 무기와 병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

부르주아들은 지주와 군부의 지지를 받는 이 반혁명파 비스마르크의 뻔뻔함에 비난을 퍼부음. 

1864 : 덴마크 침공

->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덴마크를 손에 넣고 

1866 : 오스트리아와 전쟁

-> 통일의 방해자인 오스트리아를 물리치자 부르주아의 비난은 곧 환호로 바뀜.

*대독일 주의 : 오스트리아 제국을 맹주로 하여 멸망한 신성로마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통합하여 대독일을 건설하자

*소독일 주의 : 프로이센 중심으로 소독일을 건설하자, 오스트리아 민족 중 75% 이상이 게르만족이 아니다. ->이는 독일의 순수성을 저해함. 더불어 서북부 지역에 비해서 낙후된 동남지역에 위치해있었음.

-> 결국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패배하며 소독일주의에 입각하며 프로이센을 수장으로 북독일연방탄생.

1870 : 프랑스와 전쟁(~1871)

-> 프로이센은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프랑스를 자극하여 전쟁을 일으킴

북독일 연방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제국으로 발전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이후 별개의 국가로서의 길을 걷게 됨. 그러나 대국일주의의 이념만은 그대로 남아 아돌프 히틀러에게 영향을 주어 1938년의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이어짐.

 

1871 :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즉위

->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1871년 마침내 독일 제국을 선포함.

 

1990년 :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민주공화국이 독일연방공화국에 통일된 사건.

 

이태리 통일과정

이탈리아 통일->오스트리아전쟁-> 카부르가 나폴레옹 3세에게 접근, 현실적으로 국익을 위한 방안을 모색함.

삼국동맹과 삼국협상

 

 

근대현대

 

1) 절대왕정이란 무엇인가? 절대 군주가 왕권강화를 위해 운영한 대표적인 두 제도와, 절대 왕정 시기의 경제정책 그리고 역사가들이 절대왕정 시기를 ‘초기 자본주의 시대’라고 정의한 근거에 대해 논하시오.

절대왕정이란 16~18세기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시민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나타난 절대 군주에 의한 정치 지배 체제로 근대 초기 유럽에서 보인 전제적 정치형태이다.

중세시대 당시 르네상스, 신대륙 발견, 종교개혁이라는 '인간성 재발견'의 과정을 거치며 교황의 권한은 점차 몰락하였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중세 체제의 유지에 활용되던 교황권과 황제권이 사라지자 서유럽에는 새로운 정체가 필요하였다. 중세의 공동사회는 적어도 사회 내부에 신중심의 이해와 동질성이 존재하여 질서와 안정은 자연적으로 주어졌지만, 교황권 몰락 이후 해방된 민중들의 자발적 협력을 기초로 사회질서와 안정을 이룩해야 했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절대왕정이다.

왕권강화를 위해 운영한 대표적인 두 제도

왕권강화를 위해 운영한 대표적인 제도로는 관료제와 상비군체제가 있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황제와 교황이라는 절대 권력이 사라지자, 그 동안 제후에 머물렀던 왕(제후)의 권한은 아무런 제재 없이 급속 성장하였다. 왕권은 혼자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왕의 측근에서 손발이 되어주는 관료, 다른 하나는 왕국 전체를 통괄하여 손발이 되어 주는 상비군이다. 이들은 대가를 받고 충성을 다하였기 때문에 왕은 재력을 많이 모아 이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했다.  

절대왕정 시기는 ‘초기 자본주의 시대’

이런 화폐의 중요성과 맞물려 왕들은 상업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무역에서 차액을 남겨 재력을 키우려고 했다. 결국 국내 상공업 육성, 보호관세, 식민지 쟁탈 등의 자본주의 초기 모습이 왕의 재력 확충 덕분에 본격화하기 시작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2) 프랑스의 중앙 집권적 국가의 출현을 촉진시켰던 전쟁은? 그 전쟁의 정의, 인과, 의의에 대해 논하고, 독일과 이태리 지역이 영국과 프랑스에 비하여 식민지 쟁탈이 늦었던 이유에 대해 고증하시오.

프랑스의 중앙 집권적 국가의 출현을 촉진시켰던 전쟁은 백년전쟁으로 황제의 권한이 약해지고 대귀족들의 중앙통치권이 강화되면서 서로의 이권을 위한 각축의 장이 된 것이 이 전쟁이다. 당시 잉글랜드 노르만왕조는 프랑스 영토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잉글랜드(영국)가 이 지역의 왕위 계승을 주장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는 중세 황제권이 몰락하며 대귀족들의 통치가 강화된 모습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의 경우 백년전쟁을 치르며 왕의 견제 세력인 봉건 귀족들의 대부분이 전사하였기 때문에 전쟁 이후 자연스럽게 왕의 권위를 강화할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프랑스 절대 왕정기 왕들은 자신의 욕망과 이권을 위해 위로부터의 철저한 권위적 통치만 염두에 두었다.

이런 통치모습은 루이 14세의 친정이 대표적이다. 루이는 자신의 절대권을 극대화하고자 상비군을 강화하고 남은 귀족들이 권한을 축소시키며 재력확충을 위해 식민지를 획득하고자 많은 전쟁을 치렀다. 프랑스 국민들은 루이의 통치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느끼고 왕권이 약해진 18세기 후반 자신들의 권한을 요구하는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켰다.  

독일과 이태리 지역이 영국과 프랑스에 비하여 식민지 쟁탈이 늦었던 이유

 

독일과 이탈리아는 근대로 접어들면서 교황과 황제가 유럽 전역에서 권위를 상실하자 통일 왕국이 들어서는 19세기 말까지 방황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독일의 경우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였는데, 이 제국은 영토를 기준으로 통일된 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의해 큰 봉건제에 속해있는 것에 불과했다. 때문에 각 국의 봉건 제후들이 독립된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하나의 국가로 힘을 유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식민지 쟁탈 역시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의 경우도 이탈반도에 교황령,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 등 봉건적 제후국과 도시국가가 분리되어 있었고, 외세의 간섭 및 교황당과 황제당의 대립으로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식민지 쟁탈전을 하기 어려웠다

 

3) 장미전쟁의 정의, 인과, 의의에 대해 논하시오.

정의) 장미전쟁은 일명 왕자들의 난으로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이 왕위 계승을 두고 일으킨 전쟁이다.

인과) 영국의 경우 백년전쟁으로 봉건 귀족들의 생명 손실이 적었지만 이전에 갖고 있던 프랑스 내 영토를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에 영국 본섬이란 한정된 영역에서 그들의 권력 분배를 재조정해야 했다. 두 가문의 전쟁은 모든 귀족들이 참여한 전쟁으로 확산되며 국민들의 원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자신의 이권을 차지하려는 비도덕성 때문에 왕실종친과 봉건 귀족들은 국민에게 외면당하며 파멸하고 있었다. 한편 전쟁을 끝내려는 헨리 7세는 국민들에게 절대적 귄위를 인정받아 튜더 왕조를 치로 열게된다.

 

의의) 이를 계기로 영국에서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야 왕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헨리와 튜더의 자손들은 장미전쟁을 종식시킨 국민을 의식한 통치를 염두에 두었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절대왕정의 결실은 튜더 왕가의 엘리자베스 1세 때 나타났다.  

 

4) 자유주의 정치체제와 런던 만국 박람회 국민주의 정치체제, 대해 논하시오,.

자유주의 정치체제

자유주의 정치체제는 개인의 자유를 가장 우선시 하는 사상 및 사회철학적 관점 등을 의미한다. 자유주의 정체에서는 의회주의를 통해 공동체 속에서 개개인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었고, 자유방임주의 경제와 접목되어 부를 만들면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평등해질 수 있었다.

국민에 의한 공화정을 이룬 군가는 프랑스지만, 막상 공화정과 자본주의를 결합해 새로운 정치 체제를 만든 국가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빈체제와 결별한 후 선거법을 개정하고 마지막 관세 품목인 곡물법을 폐지 함으로써 본격적인 자유주역 시대가 열렸다. 이후 노동자들의 삶이 크게 개선되었고 이는 상품의 질 향상으로 이어져 어느 나라와 경쟁해도 자신 있는 상태가 되었기에 관세가 없는 자유무역 정책을 대외에 정식으로 선포하여 재력을 쌓았다. 영국정부를 이런 강력한 자유무역 정책을 과시하고자 1851년 박람회를 개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런던 만국 박람회이다.

국민주의 정치체제

국민주의 정치체제는 자유주의 체제와 달리 자유보다는 평등을 우선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 국민주의의 정체는 황제와 교황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있어 자본주의의 발달이 더뎠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자유주의 정체로 들어서면서 의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과제를 풀면서 생겼다.  

 

독일 민족인 게르만족들은 당시 여러 국가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이 당시 관세동맹을 맺으며 무역을 하면서 초기 자본주의를 성장시켜나갔다. 이 때 민족국가로의 통일 가능성을 기대하게 되면서 '민족주의'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온 정치체제가 바로 국민주의 정치체제이다. 국민주의 정치체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된 개념으로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그러다보니 자유주의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같은 국민들의 평등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러한 사상은 독일의 독립과 팽창, 나아가 통일에 영향을 주었다.

 

5) 절대 왕권의 붕괴의 3단계와 유럽 시민혁명에 대해 논하시오.

 

6) 근대 민권의 성문화된 계보에 대해 논하시오.

 

7) 프랑스대혁명의 정의, 인과[나폴레옹의 등장까지], 의의에 대해 논하시오.

 

8) 대 프랑스 동맹이란 무엇인가? 정의, 인과, 의의에 대해 논하시오.

 

9) 빈체제와 유럽 혁명 과정에 대해 논하시오.

 

10) 독일통일 과정을, 프로이센 경제적 통합 위해 취한 조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과 연계해서 논하시오,

 

11) 이태리 통일과정을, 크림전쟁, 오스트리아 샤르데니아-프랑스 전쟁과 연계해서 논하시오.

 

12)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의 배경에 대해 논하시오.

 

13) 범 게르만주의와 범 슬라브주의에 대해 논하시오.

 

14) 영국의 3C정책과 독일의 3B정책에 대해 논하시오.

 

15) 1차 세계대전에 대해 논하시오.

 

16) 윌슨의 14조와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논하시오.